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카타 에이오 (문단 편집) == 경력 == [[다카가와 가쿠]] 이후 1961~1967년 [[혼인보전]] 7연패를 달성했다. 혼인보전 7연패의 업적을 인정받아 은퇴 후 혹은 60세 이상부터 '''명예 혼인보'''라고 자칭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는데, 해당 칭호가 1998년에 21세(世) [[혼인보 슈사이]] 이후의 대를 잇는 "○○세 혼인보 칭호"로 변경되면서 "23세 혼인보 에이쥬(本因坊栄寿)"라고 자칭할 수 있게 되었다.[* 혼인보 타이틀을 획득한 기사는 혼인보 가문을 계승하는 취지에서 이름에 '秀' 자나 '丈'자, '元'자나 '昭', '寿' 자등의 글자를 넣은 호(号)를 쓸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다. 다만 [[조치훈]]은 그냥 본인의 이름을 사용했는데, 이건 조치훈 본인이 자신의 본명 외에 다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.][* 1998년에 혼인보전 10연패에 성공한 조치훈이, 그 공적을 인정받아 곧바로 '''25세 혼인보'''를 자칭할 수 있게 되면서, 혼인보전의 명예 칭호가 현재의 방식(혼인보전 5연패 이상 혹은 통산 10회 이상 획득한 기사는 은퇴 후 또는 60세 이상부터 "○○세 혼인보"를 자칭할 수 있으며, 9연패를 달성한 기사는 곧바로 "○○세 혼인보"를 자칭할 수 있다.)으로 바뀌게 되었다.] 1963년에는 [[명인전(일본)|명인]] 타이틀을 획득해, 선수권제 최초의 '''명인 혼인보'''가 되었다.[* 그 이전에 [[명인]] 자리에 올랐었던 역대 혼인보들도 혼인보이자 명인이었지만, 그것은 그들이 혼인보 가문의 [[당주]]이자 당대 1인자였기 때문이다. 타이틀이 신문 기전화되기 전의 일이었고, 혼인보와 명인 타이틀이 모두 신문 기전화된 이후 혼인보와 명인 타이틀을 동시에 차지한 사람은 사카타 에이오가 최초였다.] 그 밖에도 각종 타이틀을 휩쓸며 [[린하이펑]]이 등장하기 전까지 일본 바둑계에서 명실상부한 압도적인 1인자로 군림했다.[* 사카타 에이오의 전성기 시절은 일본 최고=세계 최고였던 시절이었다. 그런 일본에서 각종 타이틀을 휩쓸고 1964년에는 연간 30승 2패(연간 최고 승률 부문 역대 1위.)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.][* 다만, 이후의 실적과는 달리 프로 입단은 굉장히 어렵게 했었는데, 어렸을 때 병약했던 사카타가 입단 시험을 치를 때 상대방들이 체력전으로 밀어붙였기 때문.] 1978년부터 1986년까지는 일본기원 이사장으로 재임하기도 했다. 통산 1117승 16무 654패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